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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Vol.6

바다는 계속 흐르고 산은 더 푸르르다

SPRING SUMMER EDITION

해강요 유광열 명장 인터뷰 


“아버지는 제 스승이자 저의 모든 길을 열어 준 분이에요.” 유광열 명장은 아버지인 해강 유근형 선생을 이렇게 떠올렸다. 평생 고려청자를 연구해 한국 도자기의 큰 획을 그은 해강 유 선생. 아들 유 명장에게

아버지란 어떤 존재일까. 아버지의 그늘이 부담으로 다가오진 않을까. “전혀요. 아버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을 테니까요.”

 

유 명장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가방에 흙을 넣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오직 고려청자 복원에만 매달린 청자장(靑磁匠) 인간문화재였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계속 봐왔던 터라, 유 명장은 처음에는 도자기 일과 무관한 사진관에서 일을 시작했음에도 이후 아버지의부름에 한걸음에 달려가 도자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도자기는 곧 유명장의 ‘천직’이 됐다.

 

‘해강(海剛): 바다처럼 넓고 금강산처럼 단단하고 아름답게 하라.’ 유 명장은 1993년 해강 선생이 100세로 세상을 떠난 뒤 그의 호(號)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해강의 뜻을 받들고 이어가고자 함이었다. “앞으로 2대, 3대에 계속해서 해강이란 이름으로 대를 이어 나갈 생각이에요. 일본 도공들은 계속 1대 호를 15대까지도 물려 쓰거든요. 우리나라는 이런 것들이 아직 잘 안 돼 있기 때문에 저는 앞으로 아버지와 도자기의 전통과 정신을 이어가겠단 생각으로 해강이란 호를 계속 쓸 생각입니다.”

 

유 명장은 고려청자를 복원하고자 했던 아버지의 뜻을 잇고자 전국을 뒤져 고려청자부터 조선분청사기까지 과거 도자기 유물들을 발굴하고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된 것이 지금의 ‘해강도자미술관’이다. 오랜 그의 꿈이 이뤄졌다. 아버지도 생전에 흡족해하셨다. 

 

도자기를 배운지 3년 차 때는 대한민국 최고라고 자신만만해 했던 앳된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점점 더 어려운 길이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배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고려청자를 볼 때마다 지금도 감탄해요. 신이 만든 게 아닐까. 고려시대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이 정도로 아름다운 청자를 만들었을까 싶어요.” 단순히 청자를 빚는데 그치지 않고 도자기로 브로치 등 장신구를 만들어 도자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했다. “도자기 생각을 단 하루도 안해본 적이 없어요. 이제는 제 눈에는 모든 것들이 도자기로 보여요(웃음).”

 

유 명장은 ‘이천시 1호 명장’에 이어 2002년 대한민국 명장에 선정됐다. 명장이란 무거운 칭호에 더해지는 사명감만큼 마음은 더욱 도자기를 처음 배우던 시절을 되새기게 됐다. ‘겉멋이 들면 안 되고 혼이 들어가야 한다.’ 아버지가 항상 강조했던 말이다. 

 

“쓰는 사람이 계속 보고 감탄할 정도의 느낌이 들도록 제 혼과 모든 정신을 담아야 해요. 겉멋만 들어서는 금방 식게 돼 있어요. 그래서 작품 앞에 솔직해지려 해요. 완벽하지 않은 부분 그대로를 인정하되 모든 걸 담았다고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작품을 내놓아야 하는 거죠.”

 

2대째, 그리고 지금 3대째 해강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유 명장의 꿈을 물었다. “청자는 음식이 도드라질 수 없어서 식기론 안 된다고 많이들 말을 해요. 그걸 바꾸고 싶어요. 세계인의 밥상에 해강 청자 식기가 놓이는 날을 보고 싶어요. 청자 식기로 세계 시장을 잡는 그런 업적을 꼭 남기고 싶어요.”

 

예전의 해강이 넓은 바다이자 단단한 산이었다면, 현재의 해강의 바다는 더 멀리 깊게 흐르고 있었다. 산은 더욱더 단단하고 푸르러만 간다.

 

 

WORDS : 최예선

PHOTOS : 배수경 크라프츠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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